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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켐베 무톰보:Mt. Mutombo

by 이니웍스 2022. 1. 20.

의사를 꿈꾸던 디켐베 무톰보

디켐베 무톰보는 자이르(콩고 민주공화국)에서 10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교 교장이었다고 하며 무톰보의 학창 시절 성적은 상위권이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원래 의사였고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형이 무톰보와 아버지와 논의 끝에 축구가 아닌 농구를 선택했다고 한다. 피나는 연습으로 실력을 키우던 그는 20세에 형과 함께 자이르의 청소년 국가 대표팀에 뽑히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활약을 본 미국 대사관 직원이 디켐베 무톰보의 시합 영상을 조지타운 대학교의 존 톰슨 주니어 감독에게 보냈고 감독은 바로 무톰보를 조지타운에 입학시키게 된다. 하지만 당시 무톰보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NCAA에서는 기준 학력에 못 미치는 학생은 어떤 스포츠 경기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래 의사를 꿈꿀 정도로 머리가 좋던 그는 공부에 매진하여 결국 언어학 학위를 따냈고 영어 외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하게 된다. 농구 실력도 꾸준히 향상되어 2학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매년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NBA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끌었고 1991년 마침내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

 

디켐베 Mountain 무톰보

1라운드 4번으로 덴버 너기츠에 입단한 디켐베 무톰보는 하위권을 맴도는 팀 성적과는 반대로 데뷔 첫 해에 올스타에 출전하는 등 승승장구 했고 데뷔 3년 차에는 라폰소 엘리스와 마무드 압둘 라우프와 함께 팀을 42승 40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그리고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5차전까지 끌고 가며 3승 2패로 이기며 2차전에 진출하지만 유타 재즈와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패배하고 만다. 다음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1라운드에서 패배하며 다시 내년을 기약하게 된다. 하지만 올해의 수비수상을 받는 등 그는 리그에서 최정상 수비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톰보는 경기장에서 호전적인 선수였고 상대를 블록한 뒤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상대를 조롱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즐기는 선수였다. 수많은 선수들이 그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그럴 때마다 그는 검지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에게 산(Mt.)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이후 덴버에서 애틀랜타로 이적하여 우승을 노려봤지만 당시에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의 최전성기였고 애틀랜타로써는 그들을 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애틀랜타에서 올해의 수비수상과 올 NBA 디펜시브 팀에 선정되는 등 무톰보의 커리어도 무르익고 있었다.

애틀랜타에서 1999년까지 뛰고 무톰보는 앨런 아이버슨이 있는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된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을 중심으로 한 팀이었는데 아이버슨 외에는 특출 난 공격 옵션이 없는 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비에서 제 몫을 해내며 아이버슨을 보좌했고 골밑을 굳건하게 지킨다. 이 해에 통산 네번째 올해의 수비수상을 받게 되고 다음 해에는 NBA 파이널에도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있는 레이커스였고 아이버슨의 선전으로 흥미로운 시리즈가 되긴 했지만 무톰보는 골밑에서 샤킬 오닐을 처절할 정도로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오닐은 필라델피아의 골밑을 유린했다. 시리즈 성적은 1:4로 레이커스의 우승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부터는 노쇠화로 인해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며 뉴저지 네츠, 뉴욕 닉스, 휴스턴 로키츠로 팀을 옮겨 다니게 되었다. 다만 휴스턴에서는 야오밍의 백업으로 나서며 적은 시간이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야오밍의 성장에도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코트를 떠나게 된다.

 

은퇴후의 삶

디켐베 무톰보는 1997년 자국의 내전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계기로 미국으로 돌아와 디켐베 무톰보 재단을 세워 의료지원 등 수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비암리 마리 무톰보라는 병원도 지었다. 무톰보는 고국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려 애를 썼고 기금 마련을 위해 어디든 가고 누구든 만났다고 한다. 병원 설립을 결심한 후 이동한 거리가 무려 80만 5천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하니 그가 어느 정도로 열정을 쏟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무톰보의 열정이 콩고와 더 나아가 아프리카인의 삶이 개선되는 개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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