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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트 볼:아프리카를 사랑한 남수단의 영웅

by 이니웍스 2022. 2. 9.

사자를 물리친 마누트 볼

마누트 볼은 NBA에서 루마니아 출신의 게오르그 뮤레산과 함께 역대 가장 키가 컸던 선수였다. 231cm였던 볼은 NBA에서 1985년부터 1994년까지 뛰었으며 이후 CBA와 이탈리아 리그에서도 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수단 출신이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민족 중 하나로 유명했던 딩카족 출신이다. 굉장한 장신이었던 딩카족 유전자의 영향으로 그는 농구선수로서 엄청난 장점이 될 231cm의 신장을 갖게 되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키도 엄청났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239cm로 볼 보다 더 컸고, 아버지는 203cm, 어머니는 208cm, 여동생마저 208cm 정도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농구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딩카족의 생업이었던 소를 키우는 일을 하는 소년일 뿐이었다. 특이한 점은 미국으로 건너가 농구를 시작하기 전 15살 때 소떼를 자주 습격하던 사자를 창으로 찔러 죽였던 사건으로 부족 내에서 이미 유명인사였다고 한다. 그는 18세까지 소를 키우는 일만 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의 큰 신장을 가진 민족에게 관심을 갖던 뉴저지 주의 페어레이 디킨슨 대학교 농구부 감독인 돈 페일리에게 농구를 배워보기를 제안받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런데 막상 갑작스레 미국에 도착하긴 했지만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우선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학에 대해 학교 측에서는 적격성을 두고 시비를 벌였고 결국 클리블랜드 주립 대학교로 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가 문제였고 어학원에서 따로 영어를 배우며 대학생활을 하게 된다. 1983년 드래프트 신청을 해보지만 5라운드 전체 120번으로 지명되긴 했으나 외국인 선수 나이 제한으로 인해 계약 자체가 불가능했고 대학무대에서 더 뛸 수밖에 없었다.

1984년 브리지포트 대학교로 편입해 브룩스 웹스터 감독에게 본격적으로 농구수업을 받았고, 디비전 2 소속의 낮은 레벨의 리그이긴 했으나 데뷔전에서 30 득점, 10 리바운드, 10 어시스트를 기록한다. 단지 압도적인 높이만을 가진 선수였지만 너무나도 큰 신장에 팔 길이가 259cm나 되었기에 손만 들고 버티기만 해도 상대 선수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1985년 다시 드래프트에 도전하고 2라운드 31번으로 워싱턴 불리츠에 지명되었으나 CBA 팀을 거친 후 블리츠에 정식으로 입단한다.

 

NBA 최장신 선수의 등장

그는 데뷔 자체가 센세이션 한 사건이었다. 서서 골대를 잡을 수 있는 엄청난 키, 그러나 키만큼이나 놀라운 그의 체중으로 겉모습이 먼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231cm에 90kg 정도로 마이클 조던과 비교하면 마이클 조던보다 33cm나 더 큰 선수가 그보다 몸무게가 8kg 정도 적게 나갔던 것이다. 당연히 골밑에서 블록슛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이것이 너무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에 한동안 NBA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는 데뷔 시즌 평균 3.7 득점, 6.0 리바운드, 4.96 블록슛을 기록하였는데 블록슛 숫자가 평균 득점을 넘어서는 진귀한 기록을 내며 올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7년 워싱턴에 볼만큼이나 센세이션 한 선수가 입단하게 된다.

그 선수의 이름은 타이론 보그스, 먹시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그는 신장이 160cm밖에 되지 않는 선수였다. 리그 최장신과 최단신 선수가 한 팀에서 뛰게 되며 워싱턴은 팀 성적을 떠나서 이슈몰이에는 성공하게 된다. 2년 차 시즌 마누트 볼은 출장시간이 조금 줄었지만 전 경기에 출장했고 평균 3.68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상대팀에게는 성가신 존재였지만 포인트가드 정도의 체중으로 센터를 맡다 보니 상대를 수비할 때 그냥 없는 것과 다름없는 선수였다.

박스아웃도 당연히 형편없었고 공격에서도 존재감이 없었기에 워싱턴에서 점점 자리를 잃게 된다.

87-88 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된 볼은 돈 넬슨 감독에게 3점 슛 시도를 하는 센터의 역할을 받게 되고 워낙 공격에서 어차피 존재감이 없는 그였고 워리어스가 런앤건 스타일의 빠른 농구를 구사하는 팀이었기에 어차피 공격을 따라가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래서 간간히 3점 슛을 던지며 낮은 성공률이지만 조금이나마 팀에 보탬이 되었고 팀이 88-89 시즌 성적이 전년도보다 2배 이상 오른 43승을 기록하는데 나름 기여를 하게 된다.

88-89 시즌 볼은 루키 시즌에 이어 다시 한번 블록왕을 차지하며 구단과 4년 500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볼의 기동력은 골든 스테이트와 맞지 않았기에 팀에서의 입지가 점점 줄게 되고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찰스 바클리와 친구로 지내며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90-91 시즌 3개의 블록슛, 91-92 시즌에는 2.9개의 블록슛을 기록한다.

이후 92-93 시즌 마이애미와 계약을 하지만 부상까지 있던 볼을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구단은 그를 8 경기만에 방출하게 된다. 그 후 워싱턴, 필라델피아와 10일 계약을 하며 근근이 버티다 골든스테이트에서 5경기를 뛰고 방출되며 NBA를 떠나게 된다.

아프리카를 위한 헌신

마누트 볼은 CBA나 이탈리아, 카타르 리그에서도 뛰지만 98년 류마티즘과 관절염이 악화되며 완전히 은퇴하고 고향인 수단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2000년대 후반 희귀병인 스티븐스 존슨 증후군으로 고통받기 시작하고 피부와 내장까지 손상을 입으며 자주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급성심부전이 겹치게 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하게 된다. 그때가 2010년이었고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는 수백만 달러를 벌며 아메리칸드림에 성공한 선수가 되었지만 고국 수단의 종교분쟁으로 인한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자기 연봉의 대부분을 사용했고, 국제 사회에 수단 원주민에 대한 탄압 실태를 알리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고국의 독립을 위한 행동으로 수단에 있을 당시 이슬람 정부에서 반체제 인사로 분류해 살해 위협과 탄압 연금 조치를 수년간 당하다가 이집트를 거쳐 2001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2002년부터 정치난민으로 지정되어 미국 코네티컷에 거주하고 있었다.

마누트 볼은 고국으로 거의 모든 돈을 보내버리고 막상 본인은 파산한 상태이다 보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을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만취한 기사의 택시를 탔다가 사고로 사망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볼의 처지를 알게 된 워리어스 시절 동료들의 금전적인 지원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볼은 이런 상황에서도 미식축구 선수와의 말도 안 되는 복싱 경기나 아이스하키팀과의 1일 계약, 승마선수 활동 등 남들의 비웃음을 살만한 이벤트도 마다하지 않으며 고국을 위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고국의 독립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가 사망한 다음 해 마침내 남수단은 수단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같은 딩카족 출신인 루올 뎅도 아버지의 종교적 문제로 수단 정부에게 탄압받아 이집트로 망명했었는데 여기에서 마누트 볼을 만나 농구 지도를 받았다고 하며 농구 내외적으로 마누트 볼을 매우 존경한다고 한다. 그리고 13년 후 루올 뎅은 마누트 볼을 이어 NBA의 두 번째 딩카족 출신 수단 선수로 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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