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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프라이스:클리블랜드 최고의 PG

by 이니웍스 2022. 2. 10.

바비 크레민스의 눈에 띈 마크 프라이스

마크 프라이스는 1964년생으로 아마추어 농구선수였던 아버지와 함께 연습하며 동생 맷 프라이스, 브렌트 프라이스와 슈팅력을 키웠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리 롱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선수생활을 하지만 슛에는 분명히 강점이 있었으나 그 외에는 크게 눈에 띄는 부분이 없어 대학들의 입단 제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아 공대의 바비 크레민스 감독은 그의 정확한 슈팅과 잠재력을 보고 입학을 제의하고 프라이스는 입학을 결정하게 된다.

바비 크레민스 감독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시절 명장이었던 프랭크 맥과이어 감독의 직계 제자로 1981년부터 19년간 조지아 공대에 재직하며 1990년 NCAA 4강 진출을 이뤄 이름을 날렸고 주로 포인트 가드 육성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의 손을 거쳐간 선수로는 데니스 스캇, 스테판 마버리, 존 베리, 맷 하프링, KBL에서 활약한 전태풍 등이 있다.

프라이스가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조지아 공대는 1960년 NCAA 8강에 진출한 이래 토너먼트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약체팀이었다. 프라이스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며 20.3 득점을 기록하며 ACC 최초이자 신입생 최초로 등점 1위에 올랐고, 1983년 컨퍼런스 신인상을 수상한다.

2학년 때부터는 크레민스 감독의 제안으로 포인트 가드로 뛰게 되는데 동기였던 존 샐리와 함께 팀을 13년 만에 NIT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ACC 토너먼트 결승에서 이후 동료가 되는 브래드 도허티가 활약하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꺾고 25년 만에 전국대회로 팀을 이끌고 8강까지 진출하여 패트릭 유잉의 조지타운 대학교와 상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패했지만 그는 4년의 대학시절 동안 올 아메리칸 2회, 올 ACC 퍼스트팀 3회에 선정되기도 한다.

 

클리블랜드의 중흥기를 이끌다

대학을 마친 그는 1986년 드래프트에 참가해 2라운드 25순위로 댈러스에 지명되나 바로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 되게 된다. 입단 당시 그는 마르고 유약한 외모만 보고 그에게 별 기대가 없었고 벤치멤버로 출장시킨다. 그리고 그를 대체하기 위해 다음 시즌 드래프트에서 UC 버클리의 케빈 존슨을 지명해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워보려 했으나 팀에 베테랑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그를 피닉스로 보내고 래리 낸스와 마이크 샌더스를 영입하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프라이스는 87년부터 주전으로 뛰며 16 득점, 6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특히 필드골 성공률 50.6%에 3점 슛 성공률 48.6%, 자유투 성공률 87.7% 라는 엄청난 정확성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슈터로서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정확한 슛 외에도 스탁턴 말론 콤비와 버금갈 정도의 픽 앤 롤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코트 어디에서나 스크린을 받으며 골밑으로 파고들어 가는 공격적인 선수기도 했다. 지금도 통할만한 볼 핸들링과 스피드도 좋았으며 특히 빠른 방향 전환이 일품이 선수였다. 그리고 더블팀 사이를 찢고 돌파하는 플레이의 달인이었다.

그의 정확한 슈팅 수치 때문에 저평가되어있지만 그는 슛만 할 줄 아는 1차원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성장과 같은 해 입단한 브래드 도허티 그리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래리 낸스와 동시에 3명이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고 같은해 입단한 론 하퍼의 공격력까지 더해지자 클리블랜드는 역사상 최고의 중흥기를 맞이한다. 론 하퍼는 신인시절부터 평균 22 득점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고 팀은 88-89, 91-92 시즌 57승을 거두기도 한다.

 

시카고의 벽에 무너지다

87-88 시즌 팀은 42승을 올리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만 50승을 거둔 동부의 신흥 강호 시카고 불스와 맞붙지만 3패로 스윕을 당하게 되고 1989년 팀 최고 승률을 거두고 3번 시드로 올라간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시카고를 만나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조던의 하이라이트에 늘 등장하는 The Shot의 조연이 되며 다시 탈락하게 된다.

89-90 시즌에는 론 하퍼가 트레이드되었고, 래리 낸스가 62경기에만 출장했고 브래드 도허티가 부상으로 시즌 절반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프라이스가 커리어 하이인 19.6 득점으로 분발하며 팀을 42승으로 플레이오프까지 끌고 가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90-91 시즌에는 프라이스가 부상으로 16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91-92 시즌 재정비에 성공한 클리블랜드는 다시 57승을 거두며 동부지구 2위를 차지하고 뉴저지 네츠를 1라운드에서 스윕하고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제압하며 동부지구 파이널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또 상대는 시카고 불스였고 팀은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의 벽을 넘지 못하고 6차전에서 패하고 만다.

다음 시즌은 프라이스의 커리어 최고의 시즌이었는데 18.8 득점, 8 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48.4%에 자유투 성공률이 무려 94.8%를 기록하며 생에 처음으로 All NBA 퍼스트 팀에 오르게 된다. 팀도 54승을 거두었며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플레이오프 1차전을 승리하며 2차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또다시 상대는 시카고 불스. 클리블랜드는 체격과 운동능력이 뛰어난 제럴드 윌킨스를 조던에게 붙여 그를 괴롭혀보려 했지만 이 당시의 조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선수 었다. 결국 팀은 4연패로 탈락한다.

다음 시즌 도허티와 낸스가 부상으로 대부분을 결장하며 프라이스에게는 힘든 시즌이었지만 프라이스는 1 옵션 역할까지 하며 고군분투했고 팀은 47승을 기록하며 동부지구 6위로 또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그런데 이들의 상대는 또 시카고 불스였고 마이클 조던이 1차 은퇴로 팀에 없는 시카고였지만 여전히 그들은 강팀이었고 스윕 당하며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마크 프라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와의 시리즈에서 네 번 붙어 모두 패했고 그가 없는 시카고에게도 패하며 다섯 번이나 시카고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후 30세를 기점으로 프라이스는 부상이 늘어나며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다. 말년에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되었을 때는 주전 경쟁력에서 밀려났고 골든스테이트와 올랜도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 보지만 계속되는 부상과 98-99 시즌 선수노조의 파업까지 겹치며 결국 1999년 2월 은퇴를 선언한다. 클리블랜드는 그의 활약을 기념하며 그의 등번호인 2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마크 프라이스가 건강을 더 유지할 수 있었거나 플레이오프 대진운이 좋았다면 조금 더 긴 커리어와 화려한 이력을 남길 수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전성기가 짧았고 말년에 많은 부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팬들에게 빨리 잊혀졌다.

프라이스가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에게 5번이나 시리즈를 내주었지만 이건 반대로 말하면 프라이스가 클리블랜드를 매번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시카고와 상대할만한 팀 전력을 구축해 그들에게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마크 프라이스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 중 한 명이었고 역대 최고의 슛 정확도를 가진 선수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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