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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필스:떠나간 샬럿 호넷츠의 심장

by 이니웍스 2022. 2. 4.

동물학과 출신 바비 필스

샬럿에서 태어난 바비 필스는 샬럿에서 태어나 루이지애나주의 흑인대학인 서던 대학교 동물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농구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서던 대학교에서 학업과 농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대학생활을 하였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1990-91 시즌에는 123개의 3점 슛을 성공시키며 28.4 득점, 4.7 리바운드 1.9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절 경기당 4.39개의 3점 슛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수 필스는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는데 약체팀의 에이스였던 그에게 주목하는 팀은 없었고 2라운드 45번으로 밀워키에 지명받지만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CBA의 수 폴스 스카이워커스에서 뛰게 된다. 이 팀에서 뛰던 2012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10일 계약을 제안을 받아 NBA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의 클리블랜드는 동부지구의 강팀이었다. 팀에는 블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 래리 낸스 등 올스타 선수들이 뛰던 팀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팀에서 필스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NBA에서도 통하는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점점 인지도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팀에서 마크 프라이스가 떠나고 테럴 브랜든 중심으로 팀을 새로 개편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팀의 주전 가드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팀 수비 전술의 핵심이었고 상대 에이스를 전담 마크하는 에이스 스타퍼 역할을 했다. 특히 1996년 시카고와 클리블랜드의 경기를 마치고 필스를 상대한 마이클 조던은 필스를 두고 지금까지 상대한 수비수 중 가장 강한 수비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으로 그는 이 시즌 NBA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되기도 한다.

 

호네츠 수비의 핵

1997년 바비 필스는 FA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는 높은 연봉보다는 장기계약을 원했고 샬럿 호네츠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호네츠에 합류하게 된다. 샬럿은 그의 합류 전 54승 28패를 기록하며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한 강팀이었다. 샬럿은 그를 주전 슈팅가드로 선발 출장시켰고 바비 필스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다. 여전히 그의 수비는 리그 정상급이었고 에이스 스타퍼와 팀 수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네츠에서는 이전보다 공격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트렌지션 게임에서 과감한 덩크슛을 많이 선보였고 대학시절부터 좋은 성공률을 보인 3점 슛의 위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샬럿에서의 첫 시즌 팀은 51승 31패를 기록하며 2년 연속 50승+를 달성했고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를 가볍게 꺾고 2차전에서 시카고 불스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 바비 필스와 마이클 조던의 매치업이 게임의 키포인트로 주목받았을 만큼 샬럿 수비에 있어서 필스의 비중은 상당했다. 특히 시리즈를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 조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Michael, Who?라고 대답한 것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조던의 시카고가 승리했지만 필스는 조던을 실제로 훌륭하게 막아냈고 2차전에서는 그를 22 득점으로 묶었고 이 시리즈 평균 29.6 득점을 하는데 이는 조던이 96년 플레이오프에서 유일하게 30 득점 이상을 넘기지 못한 시리즈로 기록되었다.

다음 시즌 샬럿은 급격히 성적이 나빠졌다. 주축 선수들은 부상을 당했고 글렌 라이스, JR 리드가 트레이드되며 팀을 떠나갔다. 이때 레이커스에서 에디 존슨, 엘든 캠벨이 영입되는데 에디 존스는 수준급의 득점력과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리그 정상급의 슈팅가드였다. 팀에서는 에디 존스를 선발로 낙점하고 시즌을 치르게 된지만 필스는 이에 대해 그 어떤 불만도 표현하지 않고 존스를 챙겨주며 라커룸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1999-00 시즌 그동안의 팀을 위한 헌신을 인정받아 데이비드 웨슬리와 함께 필스를 공동 주장으로 선임하며 시즌을 준비했고 팀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좋았다. 앤서니 메이슨과 래리 존슨이 인사이드에서 견고한 모습을 보여줬고 브래드 밀러, 배런 데이비스 같은 젊은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그리고 필스도 벤치에서 힘을 보탰다.

샬럿은 8연승을 기록하며 16승 7패로 시즌을 시작했는데 12월 30일부터 원정 6연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 급격하게 무너지며 6경기를 모두 패하게 된다. 이때 필스는 주장으로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너무 이른 이별

2000년 1월 원정에서 돌아온 바비 필스는 샬럿에서 슈팅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웨슬리와 이야기를 나누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레이싱을 제안받게 된다. 원래 바른생활로 유명했던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의문이기는 하지만 당시 계속되는 패배로 얼마나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을지를 상상해보면 잠시 일탈을 꿈꿨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 선택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갈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웨슬리와 필스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이 종종 이용하기도 했던 산간 도로에서 레이스를 펼쳤는데 이곳은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다 순간 중심을 잃은 필스의 차량은 마주 오던 차량과 3중 충돌하게 되고 필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샬럿과 리그는 충격에 빠졌고 샬럿은 경기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였고 그의 등번호 13번을 구단 최초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수많은 동료들이 영구결번식에 참석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특히 레이싱을 제안한 웨슬리는 시즌 내내 경찰 조사를 받으며 친구를 떠나보낸 죄책감에 시달렸다.

 

바비 필스는 언제나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고 팬들에게 따뜻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교육재단을 설립해 지역사회에 공헌하며 활발히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에게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리그 제일의 에이스 스타퍼였고 공격보다는 수비, 화려함보다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매 경기에 열정을 쏟아붓는 선수였다. 고교시절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결혼한 다정한 남편이었고 한 가정의 듬직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샬럿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라커룸 리더였으며 카리스마 있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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