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의 젊은 늑대들
스테판 마버리는 브루클린 출신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 셋도 농구선수로 대학까지는 잘 갔지만 모두 NBA 진출은 실패했다고 한다. 마버리도 형들을 따라 농구를 시작해 길거리 농구에서 이름을 날렸고 고등학교 시절 유망주들만 출전할 수 있던 맥도널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조지아 텍 대학으로 진학한 후 1년 만에 지긋지긋한 가난과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 NBA에 진출을 선언한다.
그의 기량 자체는 NBA 진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고 1라운드 4번이라는 높은 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게 된다. 그리고 바로 트레이드 되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데뷔하게 된다. 전 연도에 케빈 가넷을 얻은 미네소타는 마버리까지 얻으며 둘이 미네소타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 믿게 된다. 마버리는 데뷔 시즌에 평균 15.8 득점 7.8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루키 퍼스트팀에 올랐지만 마버리는 스몰 마켓이었던 미네소타에서의 생활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넷이 팀에게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구단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마버리는 뉴저지로 이적하게 된다.
스테판 마버리의 반복되는 징크스
뉴저지로 간 스테판 마버리는 경기당 20 득점 이상씩을 기록하며 스타로 떠오르게 되지만 팀에는 그를 받쳐줄만한 팀원은 없었다. 자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농구를 하게 된다. 그리고 2001년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되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마버리가 팀을 떠나면 그 팀이 강팀이 되는 일종의 징크스가 생기는데 그가 피닉스로 트레이드된 상대가 제이슨 키드였고 제이슨 키드는 뉴저지를 전성기로 이끌며 동부지구의 강팀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적한 팀인 피닉스에서 숀 메리언과 조 존슨,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고 2003에는 그해 우승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2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 34경기에서 22패를 기록하자 피닉스는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앤퍼니 하더웨이와 마버리를 뉴욕으로 트레이드 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때도 뉴저지 때와 마찬가지로 닉스에 스티브 내쉬가 합류하면서 피닉스는 2020년대 이전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게 된다.
고향인 뉴욕에서 플레이하고 싶었던 그는 이적 첫해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지만 다음 시즌부터 문제가 생기고 만다. 감독인 래리 브라운과 마찰을 일으켰고 무단이탈을 하는 등 팀의 분위기를 흐트러트렸다. 원래도 극성이었던 뉴욕의 언론과 팬들은 마버리에게 계속해서 비난을 퍼부었다.
08-09 시즌 피닉스에서 마찰이 있었던 마이크 댄토니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는 뉴욕에서 자리를 잃게되는데 마이크 댄토니 감독이 그는 자기 구상에 없는 선수라고 발효했던 것이다. 머버리는 프리 시즌에도 벤치 멤버로만 뛰다 정규시즌에는 아예 벤치만 지키게 된다. 그러다 뉴욕에 당장 뛸 선수가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고 마버리에게 경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하지만 마버리는 출장 지시를 거부하며 징계를 받게 된다. 결국 2009년 2월 바이아웃당하며 뉴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에 보스턴에서도 잠시 뛰었지만 금세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중국 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활용 실패
스테판 마버리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아이버슨 정도를 제외하면 포인트 가드로 출전한 선수가 자유롭게 공격을 하는 경우가 현대에 비하면 드물었다. 필라델피아 시절 아이버슨의 감독이었던 래리 브라운도 아이버슨에게 공격에서는 슈팅가드를 수비에서는 포인트가드를 맡였었지만 마버리에게는 그런 역할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패상 센스가 좋았고 뛰어난 드리블과 넓은 슛 레인지를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빅맨을 활용한 픽앤롤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본인이 직접 해결하려 하는 공격 위주의 플레이어였다는 점이다. 그에게 조금 더 자유로운 롤을 부여했다면 아이버슨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더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들은 마버리의 공격을 중시하는 태도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가 리딩을 우선하고 공격력은 그를 보조해주는 수단으로 활용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역할을 얻지 못하고 자기와 스타일이 맞는 감독과 만나지 못하고 리그에서 사라졌다.
그는 구단과의 마찰로 팀을 옮기며 저니맨 아닌 저니맨 생활을 하긴 했지만 성적에서 보듯이 먹튀는 아니었고 이기적으로 보였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데뷔가 10년정도 늦었다면 현대 농구에서 아마 듀얼 가드로써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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