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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퍼니 하더웨이:부상으로 몰락한 슈퍼스타

by 이니웍스 2022. 1. 24.

마이클 조던 이후의 최고의 아이콘

한때 그랜트 힐과 함께 NBA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던 선수였던 앤퍼니 하더웨이는 멤피스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낸 소년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우범지대에 살았던 그는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농구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하더웨이가 농구를 시작한 계기가 조금 특이한데 친구들과 미식축구를 하다 크게 다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는데 할머니가 그에게 저런 덩치들에게 깔리면 넌 죽고 말 거라고 얘기하며 농구도 미식축구만큼이나 재밌는 스포츠라고 설득해서였다고 한다.

농구선수를 선택한 앤퍼니 하더웨이는 고등학교 시절 평균 36.6 득점 10.1 리바운드 6.2 어시스트 3.9 스틸 2.8 블록슛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으로 전미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가 되어있었고 수많은 대학에서 그를 원했지만 고향팀인 멤피스 주립대를 선택하게 된다. 1학년에는 괴한에게 총상을 입어 거의 농구를 하지 못하였고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3학년 때는 평균 22.8 득점 8.5 리바운드 6.4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NCAA 토너먼트에 진출시킨다.

3학년을 마친 그는 NBA에 도전하기로 결정하고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 1라운드 3번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 그는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었던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 되어 올랜도로 향하게 된다. 올랜도에는 젼년도에 지명된 괴물센터 샤킬 오닐이 있었고 이때부터 이 둘은 꾸준히 성장하며 올랜도를 동부지구의 최고팀으로 성장시킨다.

94-95 시즌 하더웨이는 All NBA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슈퍼스타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1차 은퇴 후 복귀한 예전 같지 않던 조던을 상대했던 것이지만 시카고를 꺾고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비록 4전 전패로 탈락하긴 했지만 파이널에서도 맹활약했다. 이때 주로 매치 업되었던 드렉슬러를 상대하기 어려웠던 그는 벌크업을 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한다.

 

부상이 시작되다

95-96 시즌 앤퍼니 하더웨이는 샤킬 오닐이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는 동안 에이스 역할을 맡았고 팀은 시즌 초반 17승 5패라는 성적을 기록한다. 오닐이 결장한 22경기에서 평균 27점을 기록하며 매직의 돌풍을 이끌었고 팬들은 환호했다.

문제는 이 다음시즌부터였는데 96-97 시즌 하더웨이는 부상으로 59 경기에만 출장하게 되고 팀 성적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97-98 시즌에는 무릎 부상으로 19경기 출장에 그쳤고 다행히 50경기가 치워진 단축시즌이었던 98-99 시즌에는 전 경기 출장은 했지만 성적은 예전 같지 않았다. 올랜도는 부상으로 제 모습을 보이진 못하는 하더웨이를 피닉스로 트레이드시키게 되고 피닉스에서는 제이슨 키드와 함께 환상적인 백 코드 듀오를 결정했다며 환호했지만 이미 예전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고 00-01 시즌 다시 부상으로 무릎 수술을 받고 운동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앤퍼니 하더웨이의 초라한 마지막

잦은 부상으로 인해 운동능력을 잃은 그는 주전 자리차지하기도 버거운 상태였고 2003년부터는 벤치멤버 신세로 전락한다. 시즌 중 뉴욕으로 트레이드되었으나 그는 팀에서 경쟁력 없는 존재가 되어있었고 당시 단장이었던 아이제아 토마스는 하더웨이를 전력 외 선수로 판단하고 그의 락커룸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선수 영입을 위해 트레버 아리자와 묶여 고향팀 올랜도로 트레이드된다. 하지만 그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고향팀에서 1번 유니폼을 입고 다시 뛸 생각을 했겠지만 구단에서는 트레버 아리자에게 1번을 주고 앤퍼니 하더웨이를 바로 방출시켜버린다.

2007년 마이애미 히트와 계약해 샤킬 오닐과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 적지 않은 출전시간에도 별볼일 없는 기록만을 남기고 다시 방출당하게 되고 은퇴를 선택하게 된다.

 

마이클 조던도 이 당시 하더웨이를 인정하는 인터뷰를 많이 했으며 샤킬 오닐도 자신과 함께 뛴 가드 중 최고로 하더웨이를 꼽곤 한다. 이렇기에 올드팬들은 아직까지도 그랜트 힐과 하더웨이가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공. 수 모두에서 뛰어났던 선수들이었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지금은 멤피스 대학교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그는 여전히 리트로되는 시그니쳐 슈즈의 주인공이기도 한 90년대 최고의 아이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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