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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쿠코치:유럽 최고의 선수 시카고에 오다

by 이니웍스 2022. 1. 21.

유럽 최고의 선수, 토니 쿠코치

토니 쿠코치는 208cm의 키에 뛰어난 슈팅과 볼 핸들링 패싱 등 공격력에 있어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유로리그와 NBA에서 활약했던 선수이다. 1985년 유고슬라비아 리그의 유고플라스티카 스필트에 입단해 첫해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87년 유고슬라비아 농구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세계 주니어 선수권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 시절부터 토니 쿠코치는 유로리그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88년 리그 우승의 주역이었고 서울 올림픽에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은메달을 따기도 한다. 89년에는 유로 리그 우승과 리그 2연패, 유로 바스켓 우승을 이뤄내며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기도 한다.
1990년에는 유로리그 2연패를 달성하며 MVP도 수상하게 된다. 또한 유고슬라브 컵 우승, 유고글라브 리그 3연패를 달성한다. 이해에 FIBA에서 개최한 세계선수권 챔피언십에 크로아티아 대표로 참가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본인은 대회 MVP를 수상하는 등 모든 상을 싹쓸이하게 된다. 전부터 쿠코치를 눈여겨보던 시카고 불스의 GM 제리 크라우스는 이 해 드래프트에서 쿠코치를 지명했고 1992-93 시즌이 끝나면 시카고 불스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그와의 계약에 성공한다.
1991년 쿠코치는 유고슬라브 리그 4 연패, 유로바스켓 우승, 유로리그 3연패의 주역이었으며 유로바스켓 MVP, 유로리그 파이널 MVP도 수상한다. 거기에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 3년 연속 올해의 크로아티아 스포츠맨에 선정되었으며 FIBA에서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선수 50인에도 선정되었다.
이 시즌 중반 쿠코치는 이탈리아의 트레비소 SPA라는 팀으로 이적하게 되고 1992년 팀을 리그 우승시켰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해체하고 크로아티아 대표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다.

올림픽의 악연

토니 쿠코치는 올림픽에서도 활약을 이어가며 은메달을 따냈다. 비록 은메달이었지만 스카우터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크로아티아에게 승리하며 금메달을 가져간 것은 바로 드림팀이라고 불리는 미국 대표팀이었다. 88년 올림픽에서 소련에게 패배했던 미국은 프로선수는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 바뀐 92년 NBA 최정상급의 선수들을 올림핑에 참가시킨다.
이 당시 멤버가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래리 버드, 스카티 피펜, 마이클 조던, 클라이드 드랙슬러, 칼 말론, 존 스탁턴, 크리스 멀린,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크리스찬 레이트너였다. (크리스찬 레이트너를 제외하면 훗날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드림팀은 올림픽 8경기에서 평균 43점 차로 압승을 거두었고 35점 차 이내로 점수차가 벌어진 경기는 단 두 번 크로아티아를 상대했을 때였다.
그런데 미국과의 대결에서 쿠코치는 선수생활을 통틀어 가장 힘든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시카고로 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조던과 피펜은 그를 철저하게 전담 마크했고 전반에는 피펜이 후반에는 조던이 맡으며 쿠코치를 무너뜨린다. 미국을 상대한 두 경기에서 쿠코치는 20점 6리바운드 2스틸 4블록 10턴오버를 기록했다. NBA에서도 최정상 수비수라 불리는 두 명에게 시달린 쿠코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벤치에서 헐떡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었다.
후에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매직 존슨은 인터뷰에서 둘이 서로 쿠코치를 맡겠다고 다퉜다고 이야기했다.

시카고 불스

1993년 토니 쿠코치가 입단했을 때 마이클 조던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첫 번째 은퇴를 한 상태였다. 피펜과 함께 조던의 빈자리를 채우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수비도 평균 이하로 평가받았고 볼을 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서 시카고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내 적응하기 시작했고 신인으로써 괜찮은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에 실망스럽다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쿠코치는 사실 키가 크다 뿐이지 가드에 맞는 선수였는데 키 때문에 파워포워드로 쓰기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수비에서는 구멍이 되고 그의 다재다능함을 살릴 수 없었다. 다음 해에는 팀의 2 옵션으로 평균 15.7점을 기록했고 시즌 후반에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며 마침내 자신이 존경하던 선수와 함께 경기에 나설 수 있게 된다.
다음 시즌 데니스 로드맨 영입으로 인해 식스맨으로 보직을 변경한 그는 평균 득점은 당연히 낮아졌지만 벤치에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 해 시카고는 72승 10패를 기록하며 우승한다. 쿠코치는 이 시즌 활약으로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한다. 1998년 2분째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한 시카고 멤버들이 해체되자 쿠코치는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게 되고 99년 시즌을 마치고 필라델피아로 이적하게 된다.

아마 다른 팀에서 본인에게 맡는 역할을 부여받았다면 훨씬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을 선수였다. 그 시절 시카고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보다 현대 농구에 더 적합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였고 그런 사이즈를 가진 장신 포워드였다.
은퇴 후 골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는 2021년 국제위원회 선출 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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